월요일
새벽의 어스름 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정겨운 새소리에 눈을 뜹니다. 월요일 아침이네요.
스탠퍼드에 온 이후로는 이상하리만치 새벽녘에 자연스레 눈이 떠지는 날이 대부분입니다. 서울에서는 그렇게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는데 말이죠. 우리 집에서 가장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랑스러운 딸 예린이를 위해 조심스레 작은방으로 향합니다. 잠결 속의 아이를 깨우는 방식은 늘 같습니다. 인형 놀이 한 판으로 잠을 깨운 후, 함께 파티오로 나가 상쾌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그렇게 건강에 좋다는 미지근한 물 한 잔을 마십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눈부신 하늘 아래, 신선하고 청량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고 있자면 이곳의 살인적인 물가에 날씨와 공기 값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월요일 오전 8시에는 중요한 화상 컨퍼런스가 열립니다. Stanford Medicine의 Neurointervention 섹션에는 4명의 신경중재 영상의학과 교수와 1명의 신경외과 교수, 그리고 3 명의 임상강사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Neurointervention뿐만 아니라 neuroimaging을 총괄하는 Section Chief인 Jeremy J. Heit 교수님은 저의 faculty sponsor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에는 faculty와 fellow가 돌아가며 주제를 발표하고, 가끔 외부 연자를 초청해 강의를 듣기도 합니다. 회의 말미에는 일주일 간의 시술 일정이 공지되며, 이후 논의가 필요한 경우 faculty들만 남고 나머지 참석자는 재빨리 회의에서 퇴장합니다. 간혹 졸다가 회의에 남아 있다 보면 "Dr. Kim?" 하고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는데, 그러다 강퇴 당하지 않으려면 집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회의가 끝나면 현재 우리 집에서 가장 고가의 살림살이인 Breville 커피 머신으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내려 마십니다. 마음 다스릴 일이 별로 없는 이곳에선 굳이 핸드드립 대신 에스프레소 머신을 애용하게 되었고, 우유 맛이 뛰어난 덕분에 라떼나 카푸치노도 꽤 훌륭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다만 기기 세척에 생수를 많이 쓰게 되다 보니, 캐비닛을 열어보면 어느새 Costco에 다녀와야 할 시점이 되어 있곤 하네요.
커피 타임을 마치면, Heit 교수님의 외래를 참관하기 위해 병원으로 출근합니다. 집 근처에는 Stanford Shuttle 정류장도 있지만, 제가 살고 있는Menlo Park에서 운영하는 Country Shuttle이 집 앞에 정차하기 때문에 주로 이를 이용합니다. 셔틀에서는 극 E 성향을 자랑하는 Antwann이라는 흑인 기사님과 열심히 대화를 나누는데, 그의 대화는 대부분 본인 자랑이라 별로 어렵진 않습니다. 본인이 최고의 운전 실력을 가졌다고 자부하길래 웃으며 동조하다가, 항상 지각하는 이유를 “길이 막혀서”라고 당당하게 말할 때면 쓴웃음을 짓게 되지요. “Have a good one!”이라는 인사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약간은 열린 귀로 실전 영어 듣기 평가가 펼쳐지는 외래 참관에 임합니다. 미국에서는 video visit이라는 원격 진료도 비교적 자연스럽게 의료 시스템에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른 저녁 식사를 위해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중식당 Chef Chu's에 가기로 합니다. 대부분의 레스토랑이 월요일에 문을 닫지만, 이곳은 화요일이 정기 휴무라 월요일 저녁을 즐기기엔 최적의 장소지요. 과거 Steve Jobs 뿐만 아니라 페이스북 창업자 Mark Zuckerberg도 단골이라고 하는데, 그런 배경을 제쳐두더라도 Peking Duck은 정말 훌륭합니다. 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노을로 붉게 물든 스탠퍼드 언덕을 바라보고 있자면, 하루의 끝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싶습니다.
화요일
화요일은 바쁜 날입니다.
아침 7시 30분부터 화상으로 진행되는 Neuro Fellows Conference가 있고, 그 후에는 Stanford에서 진행되는 ESL 수업에도 참여해야 하니까요. Heit 교수님에 따르면 Stanford에서는 교수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 ‘교육’ 영역이라고 합니다. 연구는 선택 사항일 수 있지만, 교육자로서의 역량은 필수라는 것이죠. 반면, 저는 그동안 연구를 최우선에 두고 교육은 후순위로 여겨왔기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생각이 쌓여 교수들이 의학 교육에서 주도권을 잃는 현실을 초래한 건 아닌가 하는 자성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강의는 준비하는 자의 공부다’라는 제가 만든 명언(?)과 같이 매주 아침 열심히 강의를 듣지만 주옥같은 내용들이 다 제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행히 강의 녹화 파일이 있어 필요할 때 다시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은 큰 위안이지요.
ESL 수업은 Stanford의 상징인 Memorial Church 뒤편에 있는 Bechtel International Center에서 열립니다. 화요일에는 English Idioms 수업이 있고, 이를 맡고 계신 Maryann 선생님의 뛰어난 강의 실력 덕분에 이 수업은 여러 visiting scholars 사이에서 인기가 많습니다. 한시간 반 동안 가열차게 수업을 듣고 나서 병원 옆에 있는 Center for Academic Medicine (CAM) 건물로 돌아옵니다. 무더운 여름에는 Stanford Marguerite Shuttle을 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화창한 날씨를 즐기며 걷습니다. 광활한 캠퍼스를 걷다 보면 3~4 mile (대략 5~6 km)은 금세 채워지지요. 돌아오는 길에는 Stanford Bio-X 건물 1층의 Greenfish Cafeteria에서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습니다. 이곳의 총괄 주방장이 한국인이라 그런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요리 사이에 고정된 한식 메뉴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한국계 교수님이나 연구자들을 자주 마주치게 되네요. 여기서 저는 주로 비빔밥을 시켜 먹는데 한국보다 더 맛있고 풍부한 재료에 한 번 놀라고, 가격($18, 약 23,000~25,000원)에 또 한 번 놀라며, 이곳에서 $18짜리 한 끼는 싸게 느껴져서 안도하는 제 자신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놀랍니다.
운 좋게도 저는 Heit 교수님 외에도 host professor로 neuroimaging section의 Nancy Pham 교수님으로부터 CAM 3층에 작은 연구 공간을 제공받았습니다. Heit 교수님 방과 인접해 있어 자주 만나 얘기 나누기에는 더없이 좋은 곳이지요. 게다가 이렇게 넓고 멋진 건물에서 정작 상주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아 쾌적함이 배가 됩니다. 주변엔 Stanford Arboretum과 Arizona Cactus Garden이 둘러싸고 있어 산책하기에도 완벽한 환경이지요.
하지만 오늘은 한가롭게 산책할 여유가 없습니다. 이번 시즌 별다른 기대를 받지 못했던 Golden State Warriors가 Jimmy Butler 영입 이후 가파르게 상승세를 타며 마침내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오늘은 서부 리그 2위를 기록한 강팀 Houston Rockets와의 1라운드 4차전이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생전 Stephen Curry는 꼭 한 번 실제로 보고 싶었기에, 아내와 상의 끝에 고심 끝에 혼자 길을 나서기로 합니다. Oracle Park에서 열리는 야구 경기는 보통 $70~$250 선이지만, Chase Center에서 열리는 농구 경기는 $200부터 많게는 $6,000까지 이르니 그야말로"costs an arm and a leg"이라는 표현이 절로 떠오릅니다. 이처럼 비싼 입장료는 아직 농구에 큰 관심이 없는 딸아이와 함께 가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소중한 티켓을 Apple Wallet에 잘 저장해두고, San Francisco 행 Caltrain에 몸을 싣고 떠납니다. Caltrain은 쾌적하고 편리할 뿐 아니라,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경치도 매우 근사합니다. 가끔 혼자 야구 경기를 보러 가거나 와인 시음회에 갈 때에도 즐겨 이용하는데, San Francisco 역에 도착하면 경기장이나 와인 상점이 가까워 차 없이도 모든 일정이 가능하다는 점이 큰 장점입니다.
경기는 전반전부터 거의 육탄전을 방불케 할 만큼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후반전에는 Curry와 Butler의 맹활약 속에 Warriors가 승리를 거머쥡니다. Curry의 움직임을 직접 보니 공격 시에는 유려하기 그지없었고, 수비 시에는 거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몸을 던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세상 어디서든 돈을 번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됩니다.
[그림 5] Stanford Memorial Church
1903년 Jane Stanford가 남편을 기리기 위해 세운 교회로, 로마네스크와 비잔틴 양식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건축물입니다. 외벽은 화려한 모자이크 벽화로 장식되어 있고, 내부는 스테인드글라스와 정교한 목조 장식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Stanford 대학이 무종파임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는 Jane Stanford의 박애주의, 교육, 봉사라는 가치관을 상징하는 열린 공간으로 다양한 문화 및 종교 행사가 열리는 장소입니다.
수요일
수요일은 Heit 교수님의 시술이 있는 날입니다.
오늘은 basilar top aneurysm에 대해 WEB device를 이용한 색전술이 예정되어 있네요. 이곳에서는 코일 색전술은 거의 볼 수 없고, 대부분의 경우 flow diverter나 disruptor를 사용해 치료하며, WEB device의 활용 빈도도 예상보다 높습니다. WEB device 사용시 어려운 점은 사이즈 선택인데, 정확한 크기를 찾기 위해 두세 개를 직접 삽입해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험 청구 부담이 거의 없다는 점은 정말 큰 차이로 느껴지네요.
오후에는 Menlo Park 시내에 위치한 Fleet Feet 매장에서 주최하는 Fun Run 행사에 참여합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여러 러닝 크루들과 함께 인근 주택가를 3~5마일 달리는 행사인데, 매달 마지막 수요일에는 다양한 브랜드의 신제품 러닝화를 시착해볼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집니다. Brooks, Saucony 같은 전문 브랜드도 이곳에서 처음 접하게 되었고, 직접 달려본 뒤 피드백을 전할 수 있어 즐거운 경험이 됩니다. 여기 함께 뛰는 미국인 러닝 크루들은 대부분 마라톤 풀코스를 소화하는 분들이라, 5마일 정도는 마일 당 8분 이하로 가볍게 달려버립니다. 저는 낙오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죽기 살기로 따라붙지만, 결국 그들의 그림자조차 보지 못하고 혼자 돌아오게 됩니다. 그래도 모두들 끝까지 기다려주고 환영해 주는 분위기라 그들과 함께하는 러닝은 늘 즐겁습니다.
밤이 되면 다리에 쌓인 피로도 풀고, 예린이와 놀 겸 아파트에 있는 수영장과 온수풀에 갑니다. 이제 막 수영을 배우기 시작한 예린이는 겁도 없이 깊은 곳까지 헤엄쳐 들어가고, 아무리 패들이나 튜브를 착용하라고 해도 절대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말을 안 들을까요. 아들이었으면 한 대 쥐어박았을 텐데, 딸이라 그저 찍소리도 못 하고 물속에서 가라앉지 않도록 열심히 떠받들어 드립니다. 한참을 놀고 난 뒤에는 온수풀에서 조용히 피로를 풀려 했지만, 예린이의 잠수 사랑은 거기서도 계속됩니다. 다행히 여긴 깊지 않아, 저는 외면한 채 멋진 별자리가 펼쳐진 밤하늘만 바라봅니다. 이 동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 바로 밤하늘 풍경입니다. 날렵한 초승달부터 휘영청 밝은 보름달까지, 매일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달과 계절마다 새롭게 펼쳐지는 별자리는 저에게 매일 밤 30분씩 하늘을 올려다보는 새로운 취미를 갖게 해주었습니다.
목요일
목요일은 English in Action 프로그램에서 만난 Bruce 할아버지를 뵙는 날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주로 은퇴하신 어르신들이 자원봉사 형식으로 Stanford에 있는 영어 학습자들과 1:1로 만나 대화와 교류를 나누는 활동입니다. Bruce 할아버지는 트럼프를 지독히 싫어하시고 테니스와 피클볼을 사랑하시는 멋진 신사분으로, 45년 가까이 여기 Bay area에서 병리과 전문의로 활동하시다가 몇 해 전 은퇴하셨습니다. 여기 Palo Alto에서 나고 자랐으며 Stanford medical school졸업생으로 이 지역과 학교에 대한 이해가 매우 깊으십니다. 그래서 주로 캠퍼스 내 박물관(Cantor Arts Center)이나 미술관(Anderson Collection), 혹은 근처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곤 합니다. 오늘은 Palo Alto에 새로 생긴 우동집과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이탈리안 카페 Venetia를 함께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식당에 앉자마자 Bruce씨는 요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한국 선수가 잘한다며 이정후 선수 이야기를 꺼내시네요. 마침 저희 가족도 얼마 전 Korean Heritage night에 Oracle park에서 직접 경기를 보고 온 터라, 8회에 홈런을 친 이정후 선수와 팀의 승리로 즐거웠던 경험을 손짓 발짓 다해가며 신나게 설명하게 됩니다. 최근에 테니스를 치다가 무릎을 다치셔서 거동이 불편해진 할아버지를 댁까지 모셔다 드리고, 저는 잠시 CAM에 들러 하루를 정리합니다.
저녁에는 기다리던 와인 시음회가 있습니다. 이 근처의 K&L Wine Merchants는 매주 목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다양한 시음 행사를 엽니다. 한국처럼 식사와 함께하는 테이스팅이 아니라, 간단한 핑거푸드와 함께 서서 진행되는 스탠딩 파티 형식입니다. 가격은 $20~$150 정도로 다양하지만 대부분 부담 없는 수준으로, 주로 인근의 나파 밸리, 소노마 코스트, 산타 바바라 등지에서 생산된 밸류 와인을 소개하지만 때때로 컬트 와인의 생산자가 직접 방문하거나 프랑스-이탈리아 유명 와이너리의 오너가 찾아와 와인을 소개하는 특별한 시간도 마련됩니다. 그들의 깊이 있는 와인 철학과 방대한 지식,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섭외력에 놀랄 때가 많습니다. 덕분에 저도 한국에서도 유명한 Joseph Phelps나 Caymus 와이너리의 오너들과 직접 만나 포도 재배의 어려움과 그들이 추구하는 와인의 철학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있는 날입니다. 진지하게 와인을 맛보고 답안을 적어보지만, 무수한 오답을 통해 와인에 대한 나의 알량한 지식과 자신을 되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 됩니다. 정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곳의 와인 경매 사이트인데요. 여기는 정말 ‘없는 게 없는’ 세상입니다. 여기에 ‘없는 건’ 제 잔고와 크레딧 뿐이지요.
[그림 12&13] Oracle Park and Junghoo Lee at the Plate
이정후 선수는 현지 팬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활용한 ‘후리갠스(Hoo Lee Gans)’라는 팬클럽이 결성되어 활발히 활동 중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팬클럽에 한국인보다 다양한 인종의 팬들이 더 많다는 것으로, 이들이 함께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지난해 어깨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던 그가 올해는 건강한 모습으로 맹활약하는 것을 보니 정말 뿌듯하고 대견하기까지 했습니다.
금요일
금요일 아침 7시 30분에는 신경과와 신경외과에서 주관하는 Grand Rounds가 있습니다.
CAM의 대강당에서 진행되는 이 회의는 한 주간 논의가 필요했던 환자들을 중심으로 faculty 간 깊이 있는 토론이 이어지는 자리입니다. 예린이와 함께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하기에, 금요일 아침은 늘 집안이 조금 분주합니다.
두 시간 가까이 실전 영어 듣기 평가를 치르고 나면 허기가 몰려오네요. 이런 날에는 고칼로리 음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하는 것이 절실하지요.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In-N-Out Burger가 너무 맛있어 자주 찾았지만, 요즘은 지역 명물인 Gott’s Roadside의 버거에 더 끌립니다. 여기는 원래 나파 밸리 29번 고속도로 옆에서 로드사이드 다이너(diner)로 시작했지만, 입소문을 타고 지금은 캘리포니아 곳곳에 분점을 둔 대형 브랜드로 성장했고, 운 좋게도 여기 Palo alto에도 큰 분점이 있어 CAM에서 걸어서 갈 수 있습니다. 이곳 메뉴에는 특이하게도 Kimchi Burger가 있는데 저는 아직 시도해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이미 캘리포니아 버거와 밀크셰이크라는 완벽한 조합이 있기 때문이지요. 삽시간에 버거를 흡입하고 시원한 셰이크를 들이키다 보면 ‘과체중 러너’로서 현타가 오긴 하지만 이 맛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오후에는 속죄의 장거리 러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통 혼자서 9~12마일을 달리는데, 수요일 그룹 러닝과 달리 마일 당 11~12분 남짓으로 천천히 달립니다. 루트는 저희 집이 있는 Menlo Park에서 출발해 Atherton과Palo Alto를 거쳐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긴 여정입니다. 그 중에서도Atherton은 우편번호 기준으로 미국에서 가장 집값이 비싼 동네 중 하나로, 길 양옆으로 늘어선 대저택들을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정문만 봐서는 짐작조차 어려울 만큼 거대한 규모의 대저택들로, 위성 지도로 보면 수영장과 테니스장은 물론 벙커와 그린까지 갖춘 집도 보입니다. Stephen Curry나 Jeff Bezos도 여기에 집이 있다고 하지만 워낙 미 전역에 다주택을 소유하고 있는 분들이기에 실거주를 목적으로 구매하였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할로윈 시즌엔 Steve Jobs의 생가에서 락밴드 공연이 열리기도 하고, Mark Zuckerberg의 집에서는 사탕을 나눠 주는 행사가 있어 관광 명소가 되기도 합니다.
마라톤 전후에는 단백질 위주의 식단이 필수이기에, 어쩔 수 없이(?) 저녁 메뉴는 스테이크입니다. 얼마 전 Costco에서 구입한 cap steak를 아파트 클럽하우스에 있는 공용 그릴에서 구웠습니다. 이 그릴은 화력이 아주 강해 두꺼운 고기도 잘 익히며, 뚜껑이 있어 내부 온도를 유지하기에도 좋아 리버스 시어링과 같은 세밀한 조리도 가능합니다. Ribeye cap steak는 한국에서는 흔히 등심 위에 붙은 ‘새우살’과 유사한 부위로 따로 판매되는 경우가 드물지만, 이곳에서는 별도로 구매할 수 있어 무척 만족스럽습니다. 그릴 예열 온도가 250도에 이르면 고기를 올려 고온 직화 구역에서 앞뒤로 1~2분씩 시어링을 해줍니다. 이후 간접 열(indirect heat)과 뚜껑 닫기(lid closed) 방식으로 고기를 이븐하게 익히며, 심부 온도계를 이용해 중심 온도를 꼼꼼히 확인하여 완벽한 굽기를 위해 심혈을 기울입니다. 원하는 온도에 도달하면 고기를 레스팅 상태로 두고, 얼마 전 경매에서 낙찰받은 올드 빈티지 와인을 조심스레 ‘뽕따’합니다. 말 그대로 불타는 금요일이네요.
토요일
토요일에는 가족 나들이로 샌프란시스코에 갑니다.
280번 고속도로를 따라 약 50분 정도 달리면 도심이 시작되고, 이후 길 선택이 중요한 시점이 다가옵니다. 도시 정화 노력이 계속되고 있지만 여전히 일부 거리에는 마약에 취한 사람들이 좀비처럼 떠돌기 때문이지요. 무심코 구글 GPS에서 안내하는 길을 따라 이동하다 보면 그 구역을 지나게 되기에, 약간 돌아가더라도 우회하는 게 안전합니다. Pier 39에 도착하면 부둣가에 무리 지어 누워 있는 바다사자들을 먼저 만납니다. 이어지는 Fisherman’s Wharf에서는 이것저것 구경하다 몇 가지 기념품도 챙기지요.
슬슬 배가 고파질 즈음 Golden Gate Bridge를 건너 작은 해안 마을 Sausalito로 향합니다. Golden gate bridge는 언제 봐도 웅장하고 멋있는 것이 봐도 봐도 질리지 않네요. Sausalito는 유럽의 지중해 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분위기와 예술, 바다, 그리고 아름다운 경치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해안 도시입니다. 하지만 제게는 오히려 지중해보다도 부산의 해운대나 달맞이 고개처럼 정겹고 익숙한 바닷가 도시 풍경이 떠오릅니다. 현지인 말로는 이곳에 이사하려면 기존 주민들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도 하는데, 사실 여부는 알 수 없고 당분간 이사 계획도 없으니 그냥 웃어넘기기로 합니다. 바닷가 식당에서 해산물로 배를 채운 뒤, 근처 기념품 가게에 들러 예린이를 위해 인형을 몇 마리 더 데려옵니다. 특히 청둥오리와 바다사자 인형이 너무 귀여워 그냥 지나칠 수 없었지요. ‘이걸 나중에 한국으로 다 어떻게 가져가나…’ 하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일단 담고 봅니다.
오후 햇살이 부드러워질 무렵에는 언덕 하나 너머에 위치한 Muir Woods 국립공원으로 향합니다. 울창한 redwood (미국 삼나무) 숲에 들어서면 거대한 나무들 아래로 멋진 트레일이 펼쳐지고, 80~110미터에 이르는 나무들 덕분에 마치 거인국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듭니다. 예린이는Junior Ranger badge를 받기위해 동물이나 곤충을 찾아다니고, 몇 번 와본 적이 있어서 그런지 익숙한 듯 스스로 돌아다니며 찾아냅니다. 그 사이 저는 짧지만 소중한 사색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네요. 돌아오는 길에는 H-mart에 들러 삼겹살과 차돌박이 같은 구워 먹을 고기류를 사고, 풋고추와 마늘, 상추 등 곁들일 채소도 함께 구입합니다. 한국에서는 평소 잘 먹지 않던 풋고추나 상추를 몸이 먼저 찾는 걸 보니, 집 떠나와 입맛도 변하나 봅니다.
참, 오늘은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Half Dome 트레일 추첨 결과가 발표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Half Dome은 요세미티를 대표하는 봉우리로, 암벽 등반 전문가가 아니어도 별다른 장비 없이 정상까지 도전할 수 있는 ‘하이킹 끝판왕’이라 불리는 코스입니다. 전체 코스는 왕복 14 마일(약 25 km)로 마지막 케이블 구간(400 피트, 약 122 m)은 철제 케이블이 설치된 급경사 바위를 맨손으로 잡고 올라가야 하는 매우 도전적인 루트입니다. 이처럼 위험한 구간이 있기에 하루 등반 가능한 인원도 제한되어 있으며, 매년 3월경에는 연중 이용자를 대상으로 한 사전 추첨이 진행됩니다. $10 정도의 수수료로 10일치까지 신청할 수 있어 ‘개이득’이라 여겼지만,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전부 탈락이네요. 결국 Half Dome의 정상은 이번 체류 중에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운명인가 봅니다.
일요일
일요일이 되면 아무 방해도 없이 늦잠을 자고 싶지만,
그럴 틈도 없이 눈부신 아침 햇살에 일찍 눈이 뜨입니다. 커튼 너머로 비치는 파란 하늘과 따스한 햇살을 보니, 어디든 떠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기네요. 어제는 북쪽으로 향했으니, 오늘은 남쪽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차로 한 시간 반쯤 달리면 바다 내음 가득한 몬터레이(Monterey)에 닿습니다. 골퍼들에겐 페블비치 골프장(Pebble Beach Golf Course)으로 유명하지만, 우리 가족에겐 수족관과 해안 산책로, 그리고 자전거 타기에 좋은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로 기억됩니다. 태평양 연안에 자리한 바닷가 도시답게 날씨는 제주의 봄처럼 변화무쌍합니다. 화창한 날씨가 이어지다가도 어느새 구름과 거센 바람이 몰려오고, 이내 가랑비가 내리기도 하지요. 이곳에는 해안가 바위와 파도 그리고 해변이 어우러진 절경을 따라 이어지는 17-Mile Drive’라는 유료 해안 도로가 있는데, 한 번쯤은 돈을 내고 갈 만큼 멋진 풍광을 자랑합니다.
17-Mile Drive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몬터레이 반도 끝자락에 있는 아기자기한 마을 카멜바이더시(Carmel-by-the-Sea)가 나옵니다. 인구 3,200명 남짓의 이 작은 도시는 예술가와 작가들의 거주지로 유명하고, 시내 상점과 갤러리는 동화 속 마을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습니다. 이곳의 해변은 파도가 잔잔하고 모래가 곱기 때문에 아이들과 산책하기에도 그만입니다.
요즘처럼 해가 늦게 지는 계절에는 하루에 일정 하나로는 부족합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산타크루즈(Santa Cruz)의 비치 보드워크에 들러 놀이기구도 타 봅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해변 놀이공원 중 하나라는 설명처럼 이곳의 놀이기구들은 다소 낡고 허술해 보이지만, 서양인 체형에 맞춘 높이와 속도로 의외의 공포심을 자아냅니다. 예린이는 작년에 키가 작아 타지 못했던 기구들을 올해 들어 키가 부쩍 자라면서 거침없이 도전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놀랍습니다.
일요일 오후는 언제나 교통 체증이 심하기에, 우리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우회합니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두 시간을 달리다 보면, 중간에 윈디 힐 정상(Windy Hill Summit)에 들러 잠시 쉬어갑니다. 이곳은 Bay Area 전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로, 작년 독립기념일에는 이곳에서 샌프란시스코, 오클랜드, 산호세의 불꽃놀이를 모두 감상했을 정도입니다. 경치를 감상하며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예린이의 방학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이번 방학엔 또 어디로 가야 할지 벌써부터 고민이 시작되네요. 이곳은 학기 중간에도 일주일 정도의 짧은 방학이 있고, 여름방학은 두 달 가까이 이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족들이 여행을 다녀옵니다. 유치원에서도 아이들끼리 방학에 어디 다녀왔는지를 서로 이야기한다고 하던데, 요즘 예린이는 주변 친구들의 영향으로 하와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화산을 직접 보고 싶다네요. 큰일입니다. 이제 슬슬 귀국 준비도 해야 하는데 말이지요.
그래도 돌이켜 보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건 역시 여행의 추억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캠핑카(RV)를 타고 떠났던 옐로스톤(Yellowstone) 국립공원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숙소 예약에 실패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캠핑카 투어였지만, 연약한 도시남자인 저에게는 무척 이색적인 경험이었습니다. 지난 봄방학에 다녀온 자이언 캐니언(Zion Canyon)의 더 내로우스(The Narrows) 트레일도 선명히 기억에 남습니다. 방수복을 입고 4시간 이상 계곡을 따라 걷는 그 체험은, 병풍처럼 드리워진 거대한 암벽 사이를 지나며 평생 잊지 못할 장면들을 선물해 주었지요.
이제 슬슬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내일은 또 아침부터 컨퍼런스에, 예린이 등교 준비에 바쁜 하루가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오늘 워리어스(Warriors)는 또 이겼을까요? 자이언츠(Giants)는 어땠을까요? 이정후가 잘해야 했을 텐데요. 집에 가서 유튜브 TV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그리고는 “난 언제까지 이렇게 팔자가 좋을까?” 중얼거리며, 그렇게 스르르 잠이 듭니다.